전시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알폰스 무하 展

이사벨라아나 2017. 2. 18. 16:57




알폰스 무하 展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

2017년 2월 16일 목요일




고흐, 고갱, 클림트, 로댕 등 유명 미술가들과 당대에 같이 활동했지만

미술사에서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라 불리는 알폰스 무하

일러스트 화가로 상업예술에 치중했던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라

휴가를 내서 복잡하지 않은 평일을 택해서 보러갔다.




입구에 들어서니

19세기 말 파리 거리의 모습사진에 무하의 작품들로 재현해서 꾸며 놓았다.

1차 세계대전 이전 30여년의 시기를 문화, 산업 등이 모두 풍요로워 황금기라 불리는데

무하는 이 때 혜성같이 등장해서 기존의 고전 스타일을 탈피하여

자연의 꽃이나 식물 장식에서 따온 곡선을 모티브로 해서 그리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아르누보 스타일을 선보였다고 한다.


 


전시는 총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1. 프롤로그 - 무하 스타일을 완성하다

2. 스토리텔링의 예술

3. 광고 예술

4. 만인의 예술가

5. 미(美) - 일상생활의 영감

6. 에필로그 - '무하 스타일' 이후의 이야기




무하는 체코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8살 때 예수 수난도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어린시절 성당이 구심점이었는데

웅장한 건축미를 통해 신비로운 감성미를 키웠다고 한다.

이반치체의 기억이 강했던 만큼 작품 곳곳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살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빈, 독일 뮌헨에서 예술교육을 받고

예술의 본거지인 파리로 가 고갱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자스몽다 성공이후 마련한 스튜디오의 거대한 사진이 있었는데

비잔틴 양식의 동상을 비롯 흔들향, 식물들과 꽃들이 배치되어있고

중국식 자수 등 동서양의 관심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하가 활동하던 파리시절 당시 고흐, 고갱등 화가들에게 일본풍이 불었는데

그 또한 애장품인 중국식 자수 도자기 등 동양적인 것에 매료되어

일본에 관련된 일본 문화 예술을 섭렵하며 강렬한 색채대비와 뚜렷한 윤곽선등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무하는 관찰능력이 뛰어나 잡지와 책의 삽화그림을 많이 그렸다.

연재형식의 표지디자인과 글자에 디자인적인 개념을 넣기 시작했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단순한 선을 이용해 표현했는데 이는 만화작품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또한 사진작업을 이용해 구체화시킨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스토리 텔링적 요소가 녹아있는 삽화가로 떠올랐다.

후에 일본 만화작들이 무하 스타일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이러니였다.




무하는 애국자로써 체코 모라비아의 전통의상들을 모으고 문양과 수놓여진 의상에서

모티브를 따 전통세공방식의 레이스나 화병 등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기도 했다.

말년의 자화상을 보면 슬라브민족의 민속의상인 러시안 셔츠를 입고 있는데 그가

얼마나 나라를 생각하는지 단면을 알 수 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홍보 포스터를 계기로 정점의 시기에 이르는데

이때부터 많은 포스터 의뢰가 들어왔다고 한다.

18년동안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황금기를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가 가장 유명한 장식미술가로 장식 패널로 1면에 실리기도 했고

후원자의 도움으로 체코에 정착하면서

20편의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여 체코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체코의 독립으로 화폐, 기념우표 등 많은 재능기부로 기여했고

중세시대부터 내려온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의 최고 마스터 자리까지 올라가기도 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전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면서 모든 사조직을 없애면서

그때 고문을 당해 그 휴유증으로 80세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사망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이후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로 바뀌면서

광고 예술 전문인 상업예술인인 저질작가로 분류해

 서구 미술 학자들이 연구할 수 없도록 금지시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1960년대 영국의 미술학자가 연 전시회의 성공으로

무하의 작품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파리 역사박물관에 그대로 재현되어있는 보석가게의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를

사진으로 찍어서 들여왔는데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 바닥의 비잔틴양식과

기둥이나 몰딩을 곡선으로 배치하고 분수대의 여인의 조각상까지 로댕에게

조각을 배워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그의 다방면에 걸친 예술영역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광고 예술로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 제작 의뢰로

원색이 아닌 파스텔톤의 약간 미묘한 색과 여신같은 이미지로 무하의 스타일을 완성시켰는데

기존의 포스터가 아닌 새로운 형식이 파리의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원형을 등장시켜 전체적인 스토리를 하나의 캐릭터를 묘사하고

의상의 주름으로 마무리하면서 신여성의 아이콘을 만들었다.

또한 향수 등 상품에

포스터를 라벨로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상품을 캐릭터화하기 시작했다.  

모던그래픽의 선구자로 불리는 무하스타일의 머리카락 움직임이나 마무리의 주름같은 기법이

일본 에니메이션 작가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서 아르누보의 일정한 스타일을 부여한 무하의

예술이란 주제로 회화를 비롯 포스터, 삽화, 장식패널, 사진 등 그가 소장했던 애장품까지

동서양은 물론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의 관심들의 총체인

 광범위한 작품세계를 접할 수 있어서 의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