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작년에 읽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이 책의 인용이 많이 나와 읽고 싶어서 구입한 책이다.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1914년부터 1935년까지 이 책의 출간을 준비했다고 하는데
생전에는 무명의 작가였다가 사후 친구들에 의해서 발견된 원고뭉치로
50년이 지난 1982년에 이 책이 최초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20여년 동안 마치 살아있는 하나의 인간처럼 이름과 성격을 바꾸며 성장해온 형체없는 책으로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페소아의 개성과 정체성을 상당부분 반영하는 존재인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를 통해
보조회계원으로서의 피상적 일상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관조적으로 기술한 외면이자 내면의 일기인
산문형식으로 자신의 사색과 명상, 그리고 환상을 기록한 시적인 은유로 가득한 책이다.
작가 스스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슬픈 책'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얼마전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서 슬픔이라는 부제가 붙은 '페르난도 페소아'라는 제목의
조각작품를 봤는데 이 책을 읽고 과연 그 제목에 수긍이 갔다.
옮긴이의 글에서 페소아가 수많은 헤테로님을 통한 이명(異名)의 작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스스로 고독을 즐기면서 오로지 자신에게는 마약과도 같은
끊을 수 없는 글쓰기를 했던 페소아.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진한 슬픔이 가득 묻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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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장부의 새하얀 두 페이지를 새삼스럽게 들여다본다. 내가 신중하게 거기 써넣은 숫자들이
회사의 대차대조표를 이룬다. 나는 비밀스러운 미소와 함께 생각한다. 인생은 직물의 수납과 금액이 적혀 있는
출납 페이지와 같다고, 선을 그어 삭제하고 수정한 항목들과 직물의 명칭, 숫자 그리고 공란으로 이루어진 삶은
위대한 항해가, 위대한 성인,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위대한 시인의 인생까지도 포괄한다. 그들은 모두 회계장부와는
완전히 무관한 삶의 사람들이며, 세계의 값어치를 매기는 자들의 아득히 추방된 후손이다. - 31
그렇다, 예술은 인생과 같은 거리, 하지만 다른 번지에서 산다. 예술은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지만, 예술 덕분에
인생을 살기가 실제로 더 쉬워지는 건 아니다. 예술은 인생만큼이나 단조롭다. 단지 다른 번지, 다른 장소에 놓여 있을 뿐이다. - 39
열정이 배제된, 고도의 다듬어진 삶을 살기, 이상의 전원에서 책을 읽고 몽상에 잠기며, 그리고 글쓰기를 생각하며, 권태에
근접할 정도로, 그토록 느린 삶, 하지만 정말로 권태로워지지는 않도록 충분히 숙고된 삶, 생각과 감정에서 멀리 벗어난 이런
삶을 살기, 오직 생각으로만 감정을 느끼고, 오직 감정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태양 아래서 황금빛으로 머문다. 꽃으로 둘러싸인 검은
호수처럼, 그늘 속은 독특하고도 고결하니, 삶에서 더 이상의 소망은 없다. 세상의 소용돌이를 떠도는 꽃가루가 된다. 미지의 바람이
불어오면 오후의 대기 속으로 소리없이 날리고, 고요한 저녁빛 속 어느 우연한 장소로 내려앉는다. 더욱 위대한 사물들 사이에서
자신을 망각한다. 이 모두를 확실하게 인식하면서, 즐거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햇살을 주는 태양에게 감사하고,
아득함을 가르쳐주는 별들에게 감사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소유하지 않고,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굶주린 자의 음악, 눈먼 자의 노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방랑자의 기억, 사막을 가는 낙타의 발자국, 그 어떤 짐도
목적지도 없이.... - 97
누군가는 감옥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새로이 밝아오는 하루의 진부함이 견디기 힘들다. - 128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함께, 우리는 막간의 삶을 산다. - 168
하루종일 삶은 나에게 짐이었다. 내 눈동자 위에 얹힌 짐, 내 관자놀이를 누르는 짐, 눈에는 잠이 그득하고 몸 속,
관자놀이 뒤편에는 압박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위장에서 예민하게 인식하는 한없는 구토감과 절망적인
패배의식.- 193
오직 존재하지 않는 풍경만이, 오직 내가 결코 읽지 않을 책만이 피곤을 유발하지 않는다. 인생은 내 뇌에 도달하지 않은
몽롱함이다. 나는 뇌를 비워두었다. 그 안에서 내가 슬픔을 느낄 수 있도록. - 226
나에게 글쓰기는 자기 경멸이다. 하지만, 나는 글쓰기를 놓지 않는다. 나에게 글쓰기는 혐오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다. 경멸하면서도 발을 빼지 못하는 악덕과 같다. 불가피한 독이 있다. 글쓰기는 미묘한 삶의 유형이다.
영혼의 성분, 꿈의 숨겨진 폐허에서 채취한 약초, 생각의 무덤에서 꺾어온 검은 양귀비꽃, 저승의 강변에서 요란하게
가지를 흔드는 음란한 나무의 길쭉한 잎사귀들로 이루어진. - 278
나는 잠보다 더 뛰어난 쾌락을 알지 못한다. 생명과 영혼의 완전한 소등 상태, 다른 모든 존재와 인간의 완벽한 배제,
기억도 환상도 없는 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시간.(...) - 289
나는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우울하다고, 이것은 기쁨을 느낄 구실이 되지 못한다. 몽상의 즐거움은 모순과 흐릿함에
있으며, 독특하고 불가해한 방식으로만 향유되기 때문이다. - 616
인생은 감탄문과 의문문 중간에 선 망설임이다. 의혹은 마침표에 의해 종식된다. - 622
나는 거리를 걷는 것이 아니라 슬픔 속을 걷는다. 길가에 늘어선 집들은 내 영혼을 압박하는 거대한 몰이해의 정체다.
(...) 포도 위에서 울리는 내 발소리는 한밤을 깨우는 우스꽝스러운 조종이며, 영수증이나 무덤처럼, 최종적인 어떤 것이다. - 667
밤의 고독 속에서 어느 창 뒤편 익명의 등불이 타오른다. 도시의 나머지는 어둠에 싸여 있다. 단지 거리에 내린 달빛이 희미하게
반사하면서, 창백한 유령처럼 도시의 이곳저곳을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검은 밤, 집들과 집들의 색채, 그들의 색감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아마도 추상적일 것이 분명한 모호한 차이들만이, 이 견고하고도 일관적인 어둠의 겹을 깨뜨리고 드러날 뿐이다. - 729
여행? 존재 자체가 이미 여행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이라는 운명의 기차를 타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향한다. 혹은 거리와
광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얼굴로 여행한다. 마치 차창 밖의 풍경처럼 항상 똑같으면서 항상 다르기도 한 그것들을 바라본다. - 747
항상 어딘가의 창가에 서 있는 그리움의 기억이, 희망의 기억이, 신비한 미소의 기억이, 그리고 우리 존재의 문 앞에서 걸인처럼,
그리스도처럼 문을 두드리는 것들이 우리를 위로한다. - 752
어제의 경박함은 오늘 내 인생을 갉아먹는 그리움이다. -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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