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생일때 구입한 토지 21권을
12월 초부터 읽기 시작해 지난 3월 1일에 완독을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최고의 격랑 시기인 1897년부터 1945년 광복을 맞기까지의 기간 동안이다.
경남 하동의 평사리에서 부터 진주, 만주 간도, 연해주, 상해, 그리고 경성과 일본까지 공간적인 배경 또한 광대하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비극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그대로 들어있는 듯 하다.
방대한 인물 구조와 몇 세대에 걸친 대하소설.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근거하여 그 시대의 일본 문학이나 서구 문학에 대한 것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소작인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구한말 동학혁명에서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함께 작중 인물들의 섬세한 묘사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통해 줄거리자체를 아주 명쾌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3개월동안 토지를 끝내고 나니 뭔지 모를 허탈감이 몸 속 그득히 들어왔다.
삶의 무게는 예나 지금이나 주관적인 관점에서 그 틀은 그대로 인거 같고 지나고 보면 다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살아볼 가치를 찾는 다는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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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천지는 노을에 물들어서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일몰후, 물기를 머금은 듯 싱싱하고 푸르른 들판,
생기에 넘친 푸른 들판 가득히 강물 가득히,
그리고 끝없는 하늘과 구름에도 노을이요, 쉴새없이 잔잎새를 흔들어대는 버드나무 사이에도 점철된 노을은 곱기만 하다. -68(5)
하늘가득히 뿌려진 별은, 별 하나 하나에서 뿜어낸 여광들은 서로 녹아흘러서, 그야말로 은하인가,
지상에도 견사같은 엷고 어둠이 부유하고 있는 아름다운 밤이다. 밤바람이 한랭하여 더욱 맑은 느낌인지,
멀리있는 성당의 첨탑이 뚜렷하게 솟아 올라 있다. - 300(7)
나무위에 실린 눈이 바람따라 날아내리고 일출의 장엄한 광경이 빛과 그늘을 부각하듯....
사방은 태곳적같은 침묵이 쌓여간다. - 226(8)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갈증과 공포, 공포는 갈증을 잊게 하지 않는다.
갈증은 공포를 감소시켜 주지 않는다.
서로가 보강하듯,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지점까지 환국을 몰고 간다.
결국엔 모두 내곁을 떠나고 아무리 그리워도 사람은 혼자가는 거야
그래, 어떤 사태도 조용하게 받아들이자. - 196(12)
이제는 캄캄한 절벽이다. 악을 쓰고 싶을 만치 시간은 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앙혼이 빚는 관습적인 알력이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
행위도 언어도 흔적도 없었다. - 210(12)
중요하지 않았던 것을 모조리 쫓아내고 생각한 것은 그 중요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얼마나 얽매여 살아왔던가
나를 얽어맨 그것들이 사람 사는 데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때 나는 내가 자유인 것을 깨달았고
정직해지는 것을 느꼈소이다. -390(12)
겨울 하늘은 눈이 시리게 푸르고 솜같이 포근한 조각구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온은 혹심하게 떨어져서
나뭇가지에 실린 눈은 설화 아닌 빙화였고 빙하의 끝없는 수림이었다. 계곡과 언덕과 능선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영원히 잠들어 버린 것만 같았다. 달콤한 봄의 입김은 언제 일이었던지 버들가지의 그 여린 연둣빛은 꿈속에서나 보았던 빛깔은
아니었던지. 굳어버린 적막 속의 끝없는 빙화의 수림은 전율같이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 39(13)
그건 희망이 아니야! 희망일 수도 없어! 절망이 어떤 형태로 탈바꿈하여 다가올 것인가,
그것을 노려보는 눈초리에 불과한 거다! 심술궂은 눈초리 비겁한 체념의 눈초리,
그로데스크하고 편협하고 참혹한 것은 그 탓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 잠겨있는 신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스트. 나는 그것이 슬프다.- 176(13)
죽음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것. 끔찍하고 추악한 것. 당신의 영혼 속의 신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스트라는 말을 했었소. 그러나 재차 말하거니와 죽음은 꽃도 아니며 아름다운 것도
아니며 바로 현실, 주어진 현실을 넘어가는 일이요. - 177(13)
목탁소리 독경소리가 멎었다.
시간도 멎은 듯, 숲속은 소나기 그림자를 드리운 듯 어둡고 그러나 푸르게 훤하게 방과 저녁사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275(13)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싱그럽고 풀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어둠 속의 대지는 가슴에 와닿는 듯 답답하고 비좁게 느껴지는데
지평선없는 공간은 한없이 허황하여 자신이 내던져진 듯 외로움을 안겨준다. -334(13)
희미한 불빛과 바퀴 구르는 소리와 칠흑같은 창밖의 어둠, 그리고 잠들어버린 각양각색의 얼굴들, 찬하는 생명의, 삶의 부재같은 것을 느낀다.
들국화 코스모스도 없는, 한마리의 나비도 없는 철로 연변에 야적된 석탄을 비추며 반사하던 둔중한 빛마저 없는 석면과도 같은 어둠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가, 찬하는 어떤 전율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도착한 그곳도 저 깊이 모를 창밖의 어둠과 같은 어둠이 있을 뿐일가.'
'그런데 나는 왜 가고 있는 건가. 뚫을 수 없는 막막함이 있을 뿐인데 나는 무엇때문에 기차를 탄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실오라기만한 희망이라도 가졌더란 말인가. 마음의 한 오라기라도 가져보고 싶었더란 말인가. -86(15)
그것은 단절감이엇다.
시간이며 공간, 사건들이 말끔히 지워져버리는 그 아무것도 존재했을 것 같지 않은 당혹함과 상실,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까지 상실감은 스며 들어온다.
전등갓에서 우산같이 내려오는 불빛 아래 웅크리고 앉은 한 여자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방바닥이며 벽면, 천장,
자신을 둘러싼 광경이 과연 현실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머나면 지평선 같은 시간 그 자체는 대체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공포, 지금 몽롱한 의식의 흐름은 그런 공포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심장 한복판을 뚫고 바람이 설렁설렁 지나가는 것 같구나' 외로움은 아니었다. 우수도 아니었다.
생과 사의 혼동, 이승과 저승의 구분이 없어진 상태. 목적도 의미도 없어진 상실 그 자체. - 105(15)
땅위에 사는 뭇짐승들, 헐벗고 메마른 초목, 땅속에 엎드린 헬 수 없는 목숨들, 겨울 하늘을 나는 굶주린 새들, 모든 일체의
생명들이 지나간 겨울을 견디며 깨질 듯 잦아질 듯 생명의 불길을 사르며 이제 봄은 산자락에까지 왔는데 아직
산속은 하늘이 풀리고 땅이 열리지 아니하였는가. 적막은 철벽같이 사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억조창생에게 참혹한 것은
절망이 아닌지도 모른다. 체념도 참혹한 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기다림, 치열한 기다림, 그것은 시간이다. - 184(15)
참 세상이 신묘하지. 공간이 무한하고 시간이 무한할진대 그러면은 공간이 어디 있고 시간이 어디 있을꼬?
사랑이 상중하에 전후좌우를 정하고 시간을 토막으로 썰어서 죽음을 기다리니 어헛! 헛되고 헛되도다아. - 67(16)
혼란이고 목마름이었다. 순명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꿈틀거리는 한마리의 벌레.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벌레.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라는 구둣발로 짓이겨지는 것은 상상만해도
모골이 서늘해진다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얼씬거리지 않는 산장은 공포, 그것은 공포의 밤이요 공포의 낮이었다.
일각일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시간은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 83(16)
신록은 미친 것처럼 연둣빛 진초록이 서로 얽히고 설켜 일렁이고 있었다. 타고 있었다. 녹색도 탄다. 진홍의 단풍만 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생명이 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환희, 인고의 겨울은 이 환희를 예비하고 있었기에 설원은 그렇게 청정하였는가.
햇빛은 황금가루같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산장에서 바라다뵈는 앞산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짙고 옅은 빛깔, 분홍같은 연보라 빛깔들이 얼룩처럼 구름처럼 흐드러지게도 피어 있다.
'여자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아무 것도 없는데 지금 내 곁에는 햇빛과 신록과 꽃잎만이 있구나' - 105(16) -
나락과도 같은 죄의식, 뿌리쳐도 뿌리쳐도 달겨드는 덮치고 누르는 바위같은 죄의식이 그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250(16)-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량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와의 관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등뒤에서 넋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산새울음. 그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온 홍이는 상가로 향했다. - 17 (17) -
영원한 것은 없나니, 칼 든 도적은 칼로 인하여 가고, 어리석은 자는 그 순직함으로 하여 오게 될 것이니라. 만고의
진리는 무성함이요. 윤회는 인과응보를 이름이라. 우주의 질서는 사랑의 질서보다 더디게 오느니라.
허공에서 들려오는 알지못할 목소리였는지 스스로 의식 밑바닥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 86(17)
늪에 가라앉듯, 덮쳐오는 수마였다. 극도에 이른 신경들이 일시에 와해되어 기능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꿈도 없는 먹빛과도 같은 잠이었다. - 163(17)
여느때와는 다르게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자리, 그 법열의 여운이 급속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야망인가 존엄인가 모성인가....'
가슴 가득히 슬픔이 밀려왔다. 사람으로 태어난 슬픔, 사물을 쓸어안고 놓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 354(17)
어디서 오는 슬픔일까, 어디서 온 지난날들일까, 그것은 모두 바람이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서희 의식 속에서는 바람따라 나뭇잎 풀잎이 드러눕고
흔들리고 나부끼며 전율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치고 나뭇가지가 휘면서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여자의 머리칼 옷자락이 끊어질 듯 찢어질 듯
바람 가는 곳을 향해 나부끼고 있었다. 지난날 들이 눈보라같이 함박눈같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 371(17) -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 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며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해, 시간 역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없는 곳에서 파괴뿐이고 사랑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외로움, 해거름과 같은 외로움과 어떤 분노 같은 것이 그의 양어깨에 실리어 있었다. -24(18)
이상한 밤이었다. 악몽같기도 했다.
붉은빛과 검은빛이 여울같이 휘말리어 눈부시게 돌고 있는가 하면 선명하게 두가지 빛깔이 윤곽을 드러내며
갈라지기도 했다. 강렬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몽롱하게 멀어져가기도 했다.
정윤은 가끔 흰색과 붉은 색의 대비에서 공포를 느낄 때가 있었다. - 53(18)
광선이 차단된 대숲안은 어두컴컴했고 댓잎의 반영인지 푸르스름한 기가 서려있는 듯했다. 냉기가 흘렀다.
대숲 흔들리는 소리. 그 소리. 싸아! 와삭와삭 싸아! 소리는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바깥세상은 아득히 먼 피안에 있었고 사람있는 그곳이 오히려 저승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혼백이 있다면 과연
이 자리는 있을 만한 곳인가 하고 연학은 생각해본다. - 83(18)
달빛을 받은 창가 침대에 가서 짐을 부리듯 자기 자신을 던진다. 달은 창밖 느티나무 잔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물결이 오고 또 오듯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지속이며 끝없는 변화다.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211(18)-
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섦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 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 233(18) -
적이든 고난이든 대결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그 대결 이상의 불행이라는 것을 명희는 불현듯 깨닫는다. 삶의 의욕을
철저하게 잃어버린 사람. 삶의 의지가 마모되어 없어진 사람. 그것은 시계 바늘이 없어진 시계판과도 같은 것이다.
명희는 명빈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을 눈앞에 본다. 가는 시간의 슬픔보다 멈춰진 무의미한 시간이야말로 그것은
삶이 아닌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삶 자체지만 영원한 생명은 이미 나락이 아니겠는가.
'시간은 공폽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시간과 내가 마주보고 있을 때, 아마 무섭지요. 그럴 때는 도박이라도 해야 하고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심정입니다. 타락한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악마때문이지요. 사랑이라는 것도 바로 그 시간의
악마 때문입니다. 사랑은 왜 두고도 또 두려고 하지요? 그것도 바로 시간의 악마 때문입니다. 그 악마를 잊고 싶은 거지요.' - 392(18)
도시에는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 아래, 얼음 갈라지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서늘하고 푸른 하늘 아래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군상들, 누더기 같은가 하면 곤충같기도 한 군상들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혹은 같이하며 가고 있었다. - 170(19) -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바람과도 같이 영성을 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 331(19)-
얼굴을 들었다. 먼,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보낸다. 하늘과 지상의 선은 뚜렷하건만 어째
사람의 삶이 수없는 곡선으로 이다지도 수없이 얽혀 있는가.
저 하늘의, 지상의 선이 뚜렷하다. 인생도 명쾌한 것일 수는 없는가.
푸른 하늘에 실구름이 흐르는데 저 하늘과 같이 영롱할 수는 없는가. - 24(20) -
자신만의 삶의 일부를 의복으로 눈빛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며 지칠 줄 모르게 사람들은 지나가고 또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삶자체가 존재하며 그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웠다. 그런 하나하나가 무리지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엄숙하고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개미들의 행군처럼 물고기들의 군무처럼
그러나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들 - 268(20) -
"한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뭐 세속적인 욕망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절실한 것....사람들의 절실한 그 소망은 대체 무엇일까요? 근원에서 오는 절실한 그것 말입니다. - 92(21) -
세월의 부피따라 변화하는 한 시점, 시점마다의 실체는 당자들 영혼의 이력을 알려주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빛깔, 움직임, 소용돌이, 침잠, 느낌이 가능한 모든 정신영역의 추상적 형태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 137(21) -
'외로움은 사람을 이렇게 추하게 만드는 걸까? 난 도대체 뭘 거머잡으려는 거지? 물에 빠진 사랑이 지푸라기
거머집듯이 말이야' 무릎위에 얼굴을 얹는다. 망막에 불꽃이 튄다. 푸른 광선이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가는 퍼져나가고
그리고 사라진다. 밤하늘의 불꽃놀이같이 현란하다. - 203(21) -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다는 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 207(21) -
그들에게 허용된 시간의 짜임새는 실로 기기묘묘하면서도 잔혹했다 할밖에.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은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랑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종)과 자리(횡),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 230(21) -
계곡 바닥에서는 용의 혓바닥같은 지열이 솟아 오르고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달려오고, 방금 보았던 광경이 긴 밤
저쪽에서, 긴 동아줄 저쪽에서 마치 서산마루에 가라앉기 시작하는 불덩어리, 붉은 해같이 떠오른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혼합된 것이었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어우러짐, 그 광경은 혈흔같이
축소되기도 했고 시뻘건 탁류같이 확대되어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온통 붉은 빛, 미친 색깔, 진홍의 제전 같은 것, 붉은 광무..... 밤은 가는데 어둠이 내려온다.
서서히 안개비 내리듯이 어둠이 정수리에서 발끝을 질러나가는 점막이, 모든 것이 정지된다. - 37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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