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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 김연수

이사벨라아나 2012. 4. 11. 10:49

1930년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 간도에서 일어났던 '민생단 사건'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살벌했던 역사적 현장인 그곳에서

 젊은 피를 가진 자들의 비참한 정신적 혼돈을 볼 수 있었다.

역사적 비극을 그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그려낸 약간은 무거운 이야기여서 읽는 내내 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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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죠. 진실을 알게 된 고귀한 자들은 비참하게 죽는 순간에도

이 세계 전부를 얻은 셈이에요. 진실을 막을 수 있는 총검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어떤 마적단을 죽이기 위해서는 임산부의 피를 총구에 발라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죽음이 두려운 자들에게는 거짓 관념의 사슬이

필요할 테니까.  그 사슬로 유지되던 낡은 세계가 무너지자니 그 소리 요란한 셈이죠." -47 -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있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면,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라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계가 가짜일 때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 있을 때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구도 주인이 아닌, 노예만의 세상에서 폭력은 예술이다. -291 -

 

언젠가처럼 우리는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술이 덜 깬 얼굴로 벌판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달려가는 인생 열차, 달려가는 인생 열차, 황혼의 광야를 지나서 어디로 가나. 잔조롬히 스며드는 노스탤지어.

아아, 내 가슴의 노스탤지어. 고개를 돌려보면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푸른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사랑은 다만 사랑이었을 뿐이며 희망은 희망아닌 것들과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 사랑에는 의심과 증오가 스며들었으며, 희망은 가장 어두운 숲 속까지 들어가서야

간신히 찾을 수 있게 됐다 - 296 -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지금까지 내게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 우주는 신생 우주이고, 그토록 고요한 우주라고. 지금까지 나는 눈도, 귀도, 입도 없었던 존재라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맛보지 않았어요.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앳된 사람이에요.

갓 태어난 인간이에요. 이제 막 돋아난 새싹이에요. 그처럼 이 세상도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에요.

한때 나를 사로잡았던 그 소망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네요.

옷에는 얼룩만이 남아 지나간 시절들에 대해서 말해주네요.

이렇게 해서 나는 평안을 얻게 되는 건가요?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그 어떤 것에도 지지 않는 그런 평안인가요. 이제. - 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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