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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위의 식사 - 전경린

이사벨라아나 2010. 5. 10. 22:14

이 책은 전혀 뜻하지 않게 나에게 온 책이다.
별 기대없이 펼쳤는데 의외로 어떤 끌림이 있었다.

전경린의 책은 '내생에 단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 책꽂이에 꽂혀있는데
불륜의 스토리지만 이상하게 추하지 않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바닷가 마지막 집' 과 '엄마의 집'을 읽었는데
이번에 다시 접한 그녀의 책.

제목이 풀밭위의 식사.
마네의 그림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펼쳐든 책장에서
마주한 그녀의 문장들은 너무 세밀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열여섯살 아리따운 소녀시절에 풀밭위에서 깨진 유리병 주둥이를
들이밀면서
다가온 치한에게 성폭행을 당해
우울 모드일 수밖에 없는 그녀가 빠지는 사랑은 소위 말하는 불륜이다.
자신이 어쩌지도 못한  불행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경계를 긋는다.

일기를 통해서 그와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지만
결국은 뻔한 결말이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다가온 또다른 남자 기현.
누경은 치마에 집착하고
유리만드는 작업에 몰두한다.
상처입은 사람은 쉽게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현과 데이트를 하면서도
상대가 없는 것 같음을 느끼며 자신의 감정이 전혀
동요되지 않음을 오히려 당연시 여기는 그녀.
기현의 가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미동도 없다.

'이졸데와 트리스탄의 사랑의 묘약'처럼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책 처음에 만날 뻔한 남자(인서)를 다시 만나면서
마치 묘약을 마신 듯 서로의 시선에 사로잡혀 
슬픔이 묻어난 과거의 풀밭위에서
이제는 그녀에게 평온과 안락을 느끼게 하는
식사가 시작될 거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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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사람들이 가끔 섬을 그리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삶의 속성으로부터 벗어난 곳, 존재들의 고향,

삶 이전에 본질적으로 실현된 행복감이 거기 있었다.

 

햇빛이 닿으면 이내 녹아 사라질 눈꽃이라니, 이 세상에는 왜 이런 幻이 있는 것일까. 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내일이 있고,

왜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이를 것 없이 자리를 적시며 사라져갈 이런 사랑이 있는 것일까.

 

괜찮다.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 아무 의미조차 없다 해도, 햇빛이 비치면 자리를 적시고이내 사라질 눈꽃이라 해도, 이토록

아름답게 조금, 잠시, 서로를 기쁘게 해줄 수 있기만 해도 괜찮다.

 

그 환멸의 정체는 어떤 이 주일을 보냈든, 그것은 각자의 것이라는 진실이었다.

각자의 고뇌, 각자의 귀로, 각자의 그리움........

 

세상도, 삶도, 우리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의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가냘픈 의식의 줄타기뿐이야.

야윈 불빛 깜박이는 그 가난 속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알고 보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돌아나가지도 못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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