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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등 - 아키모토 야스시 장편소설

이사벨라아나 2010. 5. 22. 22:11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은 어떠할 까? 

그 순간만큼은 아무 고민도, 슬픔도 없이 그저 의식만 있을 뿐  평온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자라면서 어느날 문득 회사를 은퇴하신 아버지의 등이 한없이 초췌하고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한 그 무엇인가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늘 버팀목으로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권위와 힘이 느껴졌었는데 아버지도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세월이 주는 무거움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유약함을 드러내야 했을 때 얼마나 인생이 허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만큼보다 더 나이 먹은

나 자신의 나이듦에 대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만 이 책 또한 같은 세대로써 많은 걸 공감할 수 있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48년밖에 살지않은 중년의 샐러리맨인 후지야마 유키히로는 폐암 말기로

남아있는 삶이 단 6개월뿐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실의에 빠지기에는 살아있을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남아있는 6개월동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동안 자신의 삶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유서라하며

만나야할 사람들의 목록을 만든다.

특히 자신과 안좋았던 관계에 있었던 인연을 먼저 찾아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을 하면서 마지막 이별을 고한다.

 

눈물로 점철될 거 같은 예감이 어김없이 빗나가고 비교적 의연하게 삶의 마무리를 계획하에 차근차근 진행해가면서

과거속의 인연들을 만나는데 거기에는 자신의 중학생이었던 시절의 첫사랑과

직장생활 초기에  하룻밤의 실수로 인한 원하지 않았던 딸의 존재도 있었고, 결혼전 사귀었던 비교적 성공한 여인,

절교했던 오래된 친구등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그대로 느끼면서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계기로 만든다.

 

자신의 숨길 수밖에 없었던 현재의 애인 에쓰코와의 관계도 아내와 가족들에게 전부 털어놓음으로써

산자의 짐을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고자 하는 그에게서 정말 떠나는 자의 이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그의 숨겨졌던 과거가  잔인한 상처로 특히 아내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고통과 배신감을

느끼지만 남편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앞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이 참 묘연했다.

속으로야 더할 수 없이 황당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겉으로는 비교적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아내에게서

나라면 과연 그녀처럼 쿨하게 보낼 수 있을 까 하는 질문을 해본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먼저 지는 벚꽃이 있는 가 하면 나머지 벚꽃도 언젠가는 지게 마련이다.

도토리 키재기같은 인생을 보내려고 아웅다웅 하면서 살아가는 게 현재의 우리 모습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운이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 있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에 대해서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며

마지막을 위한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코끼리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알았을 때 무리를 떠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코끼리와는 다르게 주인공 후지야마는 가족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아주 홀가분하게 떠난다.

죽음을 알고 그 6개월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거짓없이 솔직하고 가족간의 정을 듬뿍 쏟으면서 

보낼 수 있었던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책장을 덮으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나와 연관된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