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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테라스 - 파스칼 키냐르

이사벨라아나 2019. 11. 26. 13:43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키냐르는 이 책을  수상가능성에서 되도록 멀어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1월에 출간했다고 하는데

출간 2개월만에 판매부수가 4만부를 넘어서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까지 거머쥐었다고 한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자신의 책에 대해 냉소적인 표정으로

 '사랑하던 여자의 아들을 친자로 인장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할 뿐이어서

 기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고 47개의 장들은 각기 증언,

서간, 콩트, 묘사, 대화, 아포리즘 등의 독자적인 장르를 취하면서

각 장들 간에는 독립적이면서도 어떤 연관성이 있어 

모자이크를 바라보듯 부분과 전체를

한눈에 아우르는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에칭 판화가 몸므의 이야기로

첫사랑을 잃고 얼굴에 온통 화상을 입어 절망에 빠져

로마의 테라스에서 평생 하나의 육체만 동판에 새기며 살아간

자신을 찾아온 아들마저 외면하는

한 예술가의 작업과 슬픈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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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 가는 거야 - 8


"누구나 어둠의 편린을 쫓다가 어둠에 빠져들지요.

포도알은 부풀다가 터지구요

초여름에 자두는 모두 벌어지고 말아요.

유년기가 끝날 때 어떤 남자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 14


전체가 거의 다 하얗게 보이는 드라이포인트.

빛에 잠식된 난간의 받침살들 뒤로 한 형상이 보인다.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두 눈, 흰 턱수염,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는 손,

테라스 위, 로마, 황혼녘, 하루 중 제3의 시간,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광휘에 휩싸여.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 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와 몽상의 사이에서 - 78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바람과 세월에 닳고, 피로와 기쁨에 탄력 잃은 살갗. 갖가지 체모, 눈물, 땀방울,

손톱과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마치 낙엽이나 죽은 나뭇가지처럼 땅에 떨어져,

두툼한 살갗 외부로 점점 더 빈번히 빠져나가는 영혼을 흩어지게 하지.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애.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지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83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네." - 128


"판화가를 번역자로 간주해야 한다. 번역자는 풍요롭고 멋진 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사실은 그만 못 하지만 더 강렬한 다른 언어로 바꿔놓는다.

그 강렬함은 그것과 대면하는 자를 즉시 침묵하게 만든다." - 152


선악과 이후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 것은 과다한 겉치레와 색채이다. -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