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라의 책은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에세이 '전진하는 진실' 이후 처음으로 접한다.
이 책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중 한 권인데 원제는 '아쏘무아르(L'Assommoir)'이다.
도살용 도끼 혹은 곤봉이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돌발적인 사건'을 의미하기도 하고
당시 파리 벨빌에 있던 선술집 이름이자 노동자들 사이에서 싸구려 독주를 파는 주점이라는 의미로도 통용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졸라는 이 책의 제목을 '제르베즈 마카르의 소박한 삶'으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하층민 출신의 세탁부 제르베즈는 '내 꿈은, 별 탈 없이 일하면서 언제나 배불리 빵을 먹고,
지친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 칸을 갖는 게 전부랍니다.'라고 했듯
그저 일하고 빵을 먹고 편하게 누울 공간만 필요한 소박한 꿈을 지녔지만
유전적인 알코올 중독과 어쩔 수없는 빈곤으로 인해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파멸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겪는데
남편 쿠포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삶이
한때는 자신만의 버젓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잘 나가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옛연인 랑티에와의 동거와
남편의 폭력과 알콜 중독은 그녀를 나태와 무기력증으로 이끌었고 아무 의욕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비참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허망하게 다가왔다.
19세기 혼란한 파리의 사회속에 비천한 노동자들의 가난과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며
펼쳐지는 모순같은 이야기가 좀 낯설었다.
콜롱브 영감의 주점과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공동아파트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자신만의 안식처이자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찾아가는 여정속에
끝내는 해피엔딩이 아닌 죽음으로 끝나는 과정이
어느 정도의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도 어느 한순간의 추락으로 다시
죄어오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르베즈의 운명이
정해져있었음이 새삼 불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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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제르베즈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얼음장 같은 전율과 함께 이 세상 남자들과 자신의 남편, 구제 그리고 랑티에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을 느끼며 비탄에 빠져들었다. - 310(1)
세탁소 특유의 냄새 속에서 맨팔로 다림질을 하는 땀에 젖은 세탁부 여인네들이 있고, 온 동네 여인네들이 속내를 풀어놓는
규방과 같은 이곳이 그에게는 오랫동안 꿈구며 찾아 헤매던 이상적 안식처이자 나태와 향락이 공존하는 은신처같이 느껴졌다. - 29(2)
그녀는 남자를 바꾸듯 자신의 피부도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제르베즈는 그 모든 것에 서서히 적응해갔다.
매번 몸을 씻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게으른 천성이 점차 그녀를 잠식하면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로 하여금 혼란 속에서도
가능한 모든 행복을 이끌어내도록 했다. - 75(2)
당연하게도 나태와 빈곤함이 자리 잡은 곳에는 불결함이 따라왔다. 과거에 제르베즈의 자존심이었던 하늘을 연상시키는 근사한 파란색
가게는 이젠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창틀과 판유리는 거리를 달리는 마차에서
튄 오물로 온통 뒤덮였다. - 87(2)
하지만 마르카데 가의 조그만 정원 묘지 구덩이에 남겨두고 온 건 쿠포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그리웠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과 세탁소, 가게 주인으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그 밖의 감정을 그날, 그곳에 묻고 온 것이다.
그랬다. 벽들은 텅 비어 있었고, 그녀의 마음 역시 그랬다. 그것은 완전한 파산이자 나락으로의 추락이었다. - 132(2)
빈곤에 시달리며 살면서도 제르베즈는 주위에 배고픔으로 허덕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더욱더 고통 받았다. 건물에서 이 구역은
지독하게 곤궁한 이들의 은신처였다. 마치 서너 집이 빵을 매일 먹지는 말자고 담합이라도 한 듯했다. 문을 아무리 활짝 열어놓아도 음식
냄새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오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다란 복도에는 죽음 같은 침묵만이 무겁게 깔려 있었고, 벽들은 텅 비어버린
배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 156(2)
가장 거칠면서도 단순한 일로 되돌아가는 것, 물속에서 첨벙거리고 더러운 때를 두들겨 씻어내는 것은 그녀가 아직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몰락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한 단계 더 내려갔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세탁 일은 그녀를 더욱더 초라해
보이게 했다. - 227(2)
제르베즈는 낡아빠진 신발을 질질 끌면서 서서히 샤르보니에르 가를 따라 내려갔다. 그녀의 저녁식사가 저 앞에서 웃으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저녁식사가 황금빛 석양 속으로 멀리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가벼운 전율이 느껴졌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땡전 한 푼도 없고, 더 이상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 길고 긴 밤과 지독한 굶주림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죽음으로 향하는 완벽한 밤, 숨통을 죄어오는 잔인한 방이 될 터였다! - 282(2)
그랬다. 빈곤한 노동자들끼리 아래위로 겹겹이 살아가는 초라한 공동주택에서의 삶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콜레라와 같은 가난에 전염되고 마는 것이다. 그날 밤은 그곳의 모든 사람이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 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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