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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이사벨라아나 2014. 5. 5. 20:46

 

오래전에 사두고 책꽂이에 마냥 꽂혀있는 이 책을 이제야 꺼내 들었다.

아마도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웬지 쓸쓸해 보여서

더욱 미루었던 것은 아닌지....

 

어느날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몇 년간을 살다가

작은 단서하나로 자기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으며

서서히 퍼즐조각을 끼워 맞추듯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짧으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펼쳐진다.

과연, 그는 자기자신을 온전히 찾았을까?

문득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들까지 들추어내서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안은 것은 아닌지

서서히 떠오르는 주인공 기 롤랑의 이야기가

과거의 나든 현재의 나든

결국은 지금 이순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한 모퉁이에 

홀로 서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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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 9

 

그때 내 속에서는 무엇인가 털컥 하고 걸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 방의 정경이 어떤 불안감을, 이미

내가 경험한 일이 있는 섬뜩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저 건물의 전면들, 인적이 없는 거리들, 황혼녘에 보초를

서고 있는 실루엣들이 옛날에 익숙했던 어떤 노래나 어떤 향기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같은 시간이면 자주 꼼짝도 하지 않고 여기 가만히 서서 감히 등불도 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노리듯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128

 

나는 드니즈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샀다. 내가 그 상점을 떠날 때에도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드니즈가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을까봐 겁이 났고, 이 도시 안에서, 발걸음을 서둘러 걷고 있는 그 모든

그림자 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서로 길을 잃은 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 190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오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