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프랑수아 '책과 바람난 여자'
평소와는 다르게 느긋하게 집을 나서는 목요일 아침.
오늘은 30분 일찍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으로 가면서
얇은 책이지만 시간을 질질 끈 아니 프랑수아의
'책과 바람난 여자'를 읽었다.
30년 동안 출판사에서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책만 읽고도
행복하게 사는 여자. 책과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아닌가 싶다.
책에 묻혀 살면서 인생 자체를 책을 떠나서는 잠시도 견딜수 없는
책중독자이자 독서광인 저자가
어떠한 '학위도, 직위도 북도 없는'
잡지사 베테랑 편집자라는 직업에 걸맞게 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책과 소소하게 얽힌 일상이야기들이
마치 그녀의 자서전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부부가 아이조차 갖지 않을 정도로
각자가 좋아하는 책과 함께 나이들어 감이
부러웠다고나 할까?
혹시 모를 이별할 때를 대비해서 각자의 서재를 갖고 사는 부부.
참으로 쿨하게 산다.
프랑스 작가라 책속의 책이야기가 너무 방대해 제목조차
많이 낯설었던 거 빼고는 흥미로웠다.
이 책과 담배에 관한 책 딱 두권을 냈다고 하는데
다른 책도 호기심이 간다.
책 속에서
'책을 빌려주는 일은 심각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서 불온한 부분을 삭제해야만 한다.
책꽂이에서 뽑아내고, 껍데기를 벗기고, 모래를 털어내고, 내 손때를 지워 낯선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빌린 책은 대기중인 책들 가운데 묵혀두지 말고 단숨에 원샷으로 읽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겉표지를 싸줘야 한다. 새가 알을 품듯 품어야 한다.'
'책을 버리는 것은 연애편지나 할머니의 공책을 불태우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나는 책의 재킷 표지를 좋아한다. 책에 꼭 들어맞지 않는, 몸에 꼭 끼지 않는,
매끄럽고 틈이 벌어지는 것들을 좋아한다.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면 책이 온전한 그 모습을, 원래의 솔직 담백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귀만 기울일 줄 알면 책 속의 모든 것이 음악이 된다. 책을 펼칠 때 실로 꿰맨 책등에서는 탁탁 거품이 튀는 미세한 소리가 나고, 낡은 문고판 책등에서는 책장 넘기기 개시를 알리는 묵직하고 음침한 소리가 난다. 마음이 급한 독자의 손가락 아래에서는 종잇결이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표지가 진동한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이제 더 이상 벌목을 하듯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병적인 허기증 환자가 먹은 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듯 책 마니아 역시 그 내용을 음미할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독서광은 아니더라도 책을 즐겨 읽던 사람이 책 읽기를 마다하면 그건 분명 어떤 병의 징후다. "책 읽을 마음조차 안 생겨." 이 말은 신경쇠약, 피곤,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으로, 날 책벌레, 책 허기증 환자로 만든 것은 주변의 권유보다는 몇 안 되는 엄마의 금기, 현명한 충고, 학교 규칙을 어기는 쾌감이었다. '
'독서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주지만, 세대 간의 관계, 친구들 간의 관계에 해가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사랑을 나누는 시간에는 부부 사이의 관계에도. 30분 후, 고개를 들어보면 상대방은 이미 자고 있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나 자신에게 뭘 감추는 것일까? 나는 어떤 공백을 메우는가? 내 안에는 어렴풋한 제목, 서툴게 발음된 저자 이름, 부정확한 인용문 조각들이 떼를 지어 소용돌이치고, 사야 할 참고서적의 유성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어떤 믿을 수 없는 공허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지긋지긋하다.'
'나는 더 이상 독서라는 고행에 나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문단 하나라도 대충 뛰어넘기가 무척 힘이 든다. 나는 채널 돌리듯 이리저리 건너뛰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렇게 읽느니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더 공정한 것 같다. 난 포기해버린다. 그러면 나는 일종의 환희에 사로잡힌다. 훌륭한 책을 덮으며 맛보는 후련함보다 더한 아찔한 해방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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