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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장 그르니에

이사벨라아나 2010. 9. 7. 22:42

얼마전 읽은 김경집의 '책탐'에도 소개가 된 장 그르니에의 '섬'

조용하면서 깊은 통찰을 이끌어 내고 문장 하나하나가 질긴 사유와

담백한 심성이 빚어낸 보석이라고 할 만큼

사소한 가벼움이 아닌 섬세하면서도 유연성을 지닌 꾸밈없는 언어로 이끌어 낸다.

그의 제자 알베르 카뮈의 발문에서 '알제의 저녁 속을 걸어가면서 되풀이 읽어보노라면

나를 마치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주던 저 일종의 음악같은 말들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과 견주어 볼만한 책이라고 한다.

한 마리 고양이 믈루의 죽음, 백정의 병, 담장너머에 가려진 꽃의 향기등

작가의 사소한 사유가 담긴 에세이를 발견할 무렵 카뮈도 글을 쓰고 싶은 결심을 했다고 그래서

그것을 행운이었다고 표현한다. 

섬이라는 어원이 '혼자뿐인'에서 격리된다는 뜻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읽고 싶은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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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삶에 그토록이나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몸이 마련하곤 하는 그 예기치 않은 놀라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이 낫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우리가 잔뜩 믿고 있었는데 돌연 그 믿음이 무너진다.

끝장은 항상 똑같은 것이면서도 거기에 이르는 우여곡절은 러시아 산맥의 비탈들만큼이나 다양하다. 

 

내 주위를 에워싼 침묵들은 하나씩 하나씩 더해져 갔다.

집의 침묵, 들의 침묵, 작은 도시의 침묵, 나는 여러 겹으로 싸인 솜덩어리 속에서 숨이 막혔다.

그것을 걷어내고 싶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냘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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